길을 걷고/그냥

한약이 내게 준 것 3 : 운동

하와이안걸 2015. 11. 11. 14: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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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운동의 역사는 다이어트의 역사와 같다.

운동 재개를 기념하며 그간의 흑역사를 되짚어 보는 시간을 마련했다.
기나긴 변명과 자기 위로의 시간이니 스킵하셔도 다이죠부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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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 시절, 뜀틀도 못 넘고 팔굽혀 펴기도 못하던 나는 (지금도 그러함;)
악랄하고 변태같던 체육 선생들에게 둔하고 한심하다는 말을 지겹도록 듣고 자랐다.
왜 그게 안되냐는 경멸의 눈빛 또한.
나에게 운동이란 벌(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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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에 들어와서는 돈이 없어서인지, 뒤늦게 사춘기가 왔는지
음악을 들으며 하염없이 걷는 취미가 생겼다. 
학교 안팎으로 격하게 몸 쓰는 일이 많았던, 즐겁지만 고단했던 대학 생활. 
이때 형성된 지구력 때문인지 다이어트 없이도 인생 가장 적은 몸무게를 찍기도 했다. 

이 시절 동아리가 없던 나는 하이텔에 빠져들었다.
음악 동호회를 밤새 돌아다니며 그들이 좋다는 시디를 따라서 샀다. 

90년대 후반, 2000년대 초반의 음악이 주는 벅찬 감동은 머리와 가슴을 채우고도 넘쳤고,
두 다리는 계속 걸었다. 종로, 서대문, 이대, 신촌. 나는 134번 버스였다.

복잡했던 생각은 발걸음과 함께 쪼개지고 사라졌지만, 종아리는 매일매일 굵어지고 있었다. 그걸 몰랐다. 젠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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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장생활을 하면서 수면과 식사가 불규칙해지고 몸무게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일하면서 살이 빠졌던 것은 일본 공항에서 서서 일할 때 뿐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종일 서 있다는 건 엄청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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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도 벌겠다, 나는 본격적으로 운동을 시작했다. 목적은 날씬해지는 것 뿐. 
헬스, 수영, 핫요가, 필라테스를 했으나 강사들은 나를 보며 모두 같은 말을 했다.
운동을 해봤자 소용 없다고. 저녁을 굶어야 살이 빠진다고. 
난 그들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지금 생각해 보면 앞에 '너는'이 생략되었던 것 같다. 내가 뭐요 ㅠㅠ

 
PT가 대중화 되기 전의 헬스장 주인들은 말 그대로 '강사'가 아닌 '주인'이 많았다. 저렴한 곳만 가서 그런가.
스텝퍼를 제대로 못하는 내게 기계 고장나겠다고 끌어내리던 여사장이 아직도 생생하다.
여성 전용 헬스장이어서 더 상처를 받았다.
살이 좀 빠졌다 싶으면 자기가 더 흥분해서 계속 말을 걸었다. 처음 내 모습이 때 얼마나 끔찍했는지를 강조하면서. 아 알았다고 ㅠㅠ 

수영은 회원들의 친목질에 합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왕따를 당했다. 새치기하고 드라이기 안주고 유치해서 정말;;;
다행히 나도 찬물 수영이 싫었기에 미련 없이 그만 두었다. 평형을 배우다가 만 것이 아쉽지만.

요가와 필라테스는 그나마 잘 맞았고, 가끔 평화롭고 보기 좋은 강사들을 만나기도 했지만
내가 원하는 핫요가는 점점 줄고 필라테스의 가격은 떨어질 줄을 모른다.  
그리고 점점 마른 사람들이 몰려든다는 것이 날 슬프게 했다. 


연필깎기로 치면, 심을 뾰족하게 다듬을 사람들만 오는 것이다. 
나는 나무부터 깎아야 하는데 말이지.
실제로 상담을 받다가 살 이야기가 조금이라도 나오면, 이건 다이어트 운동이 아니라며 기대치를 자꾸 낮추려는 웃긴 상황이 벌어진다.
발레도 배워보고 싶었는데. 요딴 식이면 이번 생엔 틀렸다고. 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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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나는 뭘 배워도 패배감을 안은 채 끝이 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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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에 회사를 그만두고 운동할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다.
그나마 돈이 있던 그때 연말까지 뭐라도 끊어놨다면, 지금의 나와 다른 모습일까 늘 생각한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 생각은 후회로 바뀌어 나를 괴롭히지만, 막상 상담받을 생각을 하면 끔찍하다.
전보다 더 비대해진 몸. 나이들어 더 꼬인 심성. 
나를 격하게 반기며 내 지방을 스캔하는 그들의 모습을 상상하면 소름끼치게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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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다가 집을 꾸미기 시작하면서 시디와 시디피가 한방에 만나게 되었고
죽기 전에 저것들을 한번씩은 다 들어줘야 할텐데 라는 마음이 들었다.
하루에 한장씩 BGM으로 틀기로 하고 첫 시디를 돌리는 순간
다시 심장이 쿵쾅 뛰었다.


쳐박혀 있던 싸구려 케틀벨을 들고 데드리프트를 시작했다.
겨우 8키로지만 바닥에 놓을 때 꽤 신경이 쓰여서 요가 매트와 덤벨을 주문했다.
빅뱅과 봄여름가을겨울, CB MASS와 조규찬, 샤이니와 강현민, 리사 오노와 타히티 80.
쿵쾅쿵쾅쿵쾅쿵쾅.




이마트 케틀벨 8kg, 홈플러스 덤벨 각각 1kg, 요가매트 6mm






이젠 정말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