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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고/그냥

리얼 브라우니

by 하와이안걸 2010. 8. 25.


집으로 가는 길 허기를 느끼고 지갑을 열어본다. 4천원. 그리고 가벼운 동전 몇 개. 학교 앞에서나 가능할 법한 한 끼 식사 가격이다. 집에 가서 찬 밥에 라면을 먹을지, 맥도날드에서 작은 버거세트를 먹을지 고민이다. 희한하게도 이런 날은 평소에 즐기지도 않는 패밀리 레스토랑이나, 함흥냉면 집에서 파는 갈비탕과 왕만두 생각이 간절하다. 방금 지나친 삼겹살 집의 기름진 열기에 몸을 던지고픈 충동까지 일어난다. 그러나 다시 냉정을 되찾고 김밥에 라볶이도 생각해본다.
그래. 맥도날드 따위로도 성에 안차는데 김밥천국은...
생리 직전. 식욕은 충만하다. 문제는 양과 질 모두를 원한다는 것.



여자였다면 어땠을까. 생리중이라면 죄가 가벼워졌을까. 죄책감도 덜할까. 친구들도 다 이해해줄까. 소위 빽으로 풀려났지만 기분은 찜찜하다.
난 이미 쓰레기다. 그냥 소각장으로 직행하고 싶은데 다시 길바닥에 떨어진 신세. 줍지도 않고 치우라는 잔소리도 없고, 그냥 모두가 적당히 피하고 모른척 해버리는 존재. 다시 밑바닥 생활이 시작되었다. 내가 왜 이러는지는 모른다. 엄마는 '도대체 왜'를 하루에 백번씩 외치지만 해줄 말이 없다. 그게 왜 죄가 되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을 뿐. 
어차피 매번 들키고 사과하고 돌려주는 패턴. 지갑 속을 들여다본 적은 있지만 돈을 뺀적도 없고, 영수증은 흐트러질까봐 건드리지도 않는다. 투명하게 신분증이 보일 때는 혹시나 주민등록번호를 외울까봐 시선을 피한다.




결국 집에서 밥을 해결하고 대신 디저트를 먹기로 한다. 아무 망설임 없이 파리바게트로 들어간다. 조각케이크는 어느 덧 5천원이 되었다. 슈크림이나 마들렌 같은 것을 사면 충분하겠지만 오늘은 안된다. 크림이 듬뿍 들어간 연유바게트의 볼륨 정도는 되어야 만족할 것 같다. 작으면 작은 대로 점성이 좋아야 한다. 치즈케이크나 브라우니처럼. 하필이면 파리바게트의 치즈케이크가 품절이고. 가만있자. 브라우니. 
어제 옆자리 P 가 나누어준 마켓오의 리얼브라우니가 떠오른다. 그런걸 광고하는 것만 알았지 사먹을 생각은 못했다. 정신없이 편의점에 들어간다. 네 개에 2700원. 오뜨에 비하면 확실히 비싼 가격이지만 납득할 수 있었다. 어제 한 입 베어문 순간 아주 잠깐이었지만 삶의 이유를 느꼈으니까. 
'용서할 수 있어'
과자를 먹고 이런 기분을 느낀 것은 처음이었다. 게다가 어디서나 사먹을 수 있고 며칠을 두어도 불안하지 않다. 먹어도, 먹지 않아도, 빈부의 차이가 느껴지지 않는 점도 좋았다. 그렇게 적당한 명품이 손닿는 거리에 있다는 자체가 분명 행복이었다.



아줌마는 시끄럽다. 여고생도 시끄럽다. 아저씨는 시끄러운데다 무섭다. 그냥 내 또래의 여자들이 가장 좋다. 위에서 그녀들의 가방을 내려다보는 순간이 가장 짜릿하다. 그 안에서 듬성듬성 보이는 소지품들 속에서 지갑을 발견할 때의 기쁨을 즐긴다.
여자친구가 있을 때는 화장실 앞에서 늘 가방을 들고 기다려주었다. 말로는 창피하다고 했지만 속으로는 자랑스러웠다. 가방 안의 옹기종기 자리잡은 소품들을 보면 미래의 신혼집을 보는 듯 했다. 그리고 그 안의 지갑을 보면 흥분이 되었다. 애인이어도 함부로 열어볼 수 없는 지갑. 우리 사랑의 비밀을 들여다보듯 사랑스럽게 바라보곤 했다.
그녀와는 이유도 모른채 헤어졌지만 그 이후로도 여자의 가방은 늘 나의 호기심 대상 1호였다. 특히 가방에 지퍼가 채워져있지 않거나, 속이 잘 보이는 가방을 발견했을 때에는 내 안의 마초가 꿈틀대곤 했다. 마치 가방 주인의 제대로 된 첫 남자친구가 된 것 처럼.



망설임 없이 지갑을 열었다. 남는 돈으로는 900원짜리 빅사이즈 1개를 추가 구입했다. 지하철 역으로 가는 길에 빅사이즈 한개를 찢어 문다.
그래. 이거야.
하루종일 자신을 억누르고 있던 불안한 마음이 녹아드는 느낌. 1 바삭하고 2 촉촉하고 3 달콤하고 4 진하다 5 그리고 다시 산뜻해진다. 반복되면 될수록 쾌감을 느꼈다. 가방 속 박스도 단숨에 해체하고 싶지만 식후로 남겨두기로 한다. 오늘 다 먹을지, 2개씩 이틀에 나누어먹을지 생각한다. 아침 대용으로 커피와 먹어도 좋겠다. 녹차나 둥굴레차도 좋겠다. 월급날까지 굶어도 좋다. 라면만 먹어도 좋다. 지금은 이 브라우니가 나의 전부다.



엄마의 우아한 꾸중을 듣다가 다시 나와버렸다. 친구들을 찾아봤지만 다들 중간고사 준비로 바쁘다고 한다. 이미 소문이 다 나버린 것 같다. 중학교 친구 중 한 명이 어찌나 반갑게 전화를 받던지, 얼굴이 다 보고 싶어졌다. 역까지 걸어가는 길. 우리 동이랑 지하철 역은 제법 멀지만 부동산에서는 언제나 1분 거리 초역세권이다. 이 한 걸음의 매매가는 얼마일까. 지하철 역까지 천만원 쯤 되려나. 
지하철에 들어서니 생각보다 한산하다. 그러나 비집고 앉아있고 싶지는 않다. 반대편 출입구에 옆으로 기대어 게임이나 해야지. 그런데 내 뒤에, 그러니까 좌석의 맨끝 자리에는 유난히 피곤해보이는 여자가 가방과 함께 무언극을 하고 있다. 보통 가방을 감싸 안고 가방 입구로 고개를 푹 숙이고 자는데, 이 여자는 선잠이 깰 때마다 옆으로 멨다가 무릎 위에 놓았다가 난리가 났다. 점점 정신을 잃기 시작했는지 그녀의 가방은 급기야 서 있는 나를 밀어내고 있었다. 팔이 풀릴 일은 없으니 떨어뜨리지야 않겠지만 가방만 삐죽 나와있으니 여간 거슬리지 않는다. 자리를 이동해서 그녀 앞에 서 본다.



눈을 뜨니 논현역이다. 아직 집까지는 멀었다. 갑자기 너무 번쩍 눈을 떴더니 건너편 사람이 화들짝 놀란다. 고개를 돌려 주위를 본다. 다 나와 같은 직장인들이다. 강남에서 동작구 어딘가로, 광명 어딘가로 가는 사람들. 반포역에서 남자 하나가 들어온다. 가방도 없고 청바지 차림이다. 동네 사람이다. 친구를 만나러 가는걸까. 동네 친구라면 버스로도 충분할텐데 왜 지하철을 탔을까. 그의 빈티지 청바지의 결을 세다가 다시 잠들어버렸다.



작은 가방 안에 이것저것 넣다보니 부피가 커져 모양이 살지 않는다. 가방 입구의 자석은 애진작에 오픈된 상태. 빨간색 장지갑이 눈에 들어온다. 역시 불룩하고 모서리에는 때가 묻어있다. 저 안에 들어있을 수 많은 쿠폰과 영수증들. 헤어진 그녀 생각에 웃음이 날 뻔했다. 그나저나 나는 또 봐버렸군. 젠장.
그만 해야지 하는 순간 뜯지도 않은 과자 상자가 보인다. 가방에 먹을 것을 넣고 다니는 여자. 흥미롭다. 왜 집 앞에서 사지 않고 미리 샀을까. 왜 하나도 뜯어먹지 않았을까.
호기심으로 시작된 상상은 멈추지 않는다. 자리를 조금씩 이동해 그녀의 가방을 등뒤로 가린다. 그리고 그녀의 뒷모습을 마지막으로 본다. 가방, 옷차림, 머리모양. 그에 비해 지갑은 고급이다. 짝퉁일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저 정도의 퀄리티라면 수 없이 발품을 팔
았을 것이다. 원래부터 돈은 목적이 아니었다. 저 불룩한 감촉을 느껴보고 싶지만 개찰구에서 망신을 당하게 할 순 없지.
자, 마침 내리는 문이 이쪽. 안녕. 밤에 이런거 먹으면 못써요. 압수.



집에 도착해서는 라면물부터 올린다. 아직도 비몽사몽.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더니 식욕도 없다. 김치 냄새 뿐인 냉장고. 열고 닫는 낙이 없다. 맛은 없고 온기만 있는 밥도, 설거지도 다 싫다. 
끓는 물에 라면 대신 보리차 티백을 넣어버렸다. 그래. 완벽한 저녁식사가 될거야.

 

친구를 만났지만 겉도는 대화 속에 1차로 끝이 나고 말았다. 돌아갈 때는 택시를 타게될 줄 알았는데 다시 7호선. 지하철역 앞에서 담배를 피우려고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더니 낯설고 시원한 감촉이 느껴진다. 술자리에서 친구놈이 세 개나 뜯어먹고 남은 하나, 그 과자다. 술냄새도 없앨 겸 맛이나 볼까.
오늘은 이깟 과자 하나로 끝났지만 기분은 좋았다. 뭔가 좋은 일을 한 것 같고. 죄책감도 덜하다. 아니지. 이걸로 붙잡혀가면 더 억울하려나.



말도 안돼. 믿을 수가 없어. 전혀 흘린 기억이 없는데. 떨어졌으면 소리라도 났을텐데.
지갑 속은 멀쩡하다. 귀신에 홀린 듯, 꿈이라도 꾼 듯 몽롱하다.
꿈을, 꾸었지. 깊이...
그런데 왜 지갑이 아닌 브라우니를. 돈 없는 지갑은 밖에서도 보이는걸까.
차라리 지갑을 도둑맞는 것이 나았다. 이참에 신용카드도 모두 정리하고, 무엇보다도 십년이나 묵은 지갑에서 죄책감 없이 벗어나고 싶었다.
고등학교 졸업 선물로 받았던 나의 첫 지갑. 그 후로 십년간 열심히 돈을 모았지만 늘 월급날 전에는 이렇게 배가 고팠다. 열심히 일했기에, 내 잘못이 아니었기에 더 견딜 수가 없었다. 부모의 죄가 지갑에 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때가 묻을 수록, 가죽에서 냄새가 날 수록 부모님이 생각나 진저리가 났고 그래서 버릴 수도 없었다.

참담하다. 나는 브라우니 한 곽의 행복조차 누리지 못한다. 
짝 잃은 보리차는 맹렬하게 끓어오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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