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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고/그냥

100 그릇 (지큐 100회 특집 중에서)

by 하와이안걸 2009. 6. 4.


1 백반 - 을지로 승희네 가정식백반
텁텁한 우거지국, 자반고등어 반 토막, 살짝 숨 죽은 부추무침, 두텁게 꾸덕꾸덕 부친 두부, 구운 김, 썰지 않고 주는 포기김치, 금방 부친계란‘후라이’. 좁은 탁자 몇 개 전부인 승희네는 언제나 같은 반찬을 낸다(여름엔 오이나 오뎅이 더 나오기도 한다). 맛도 늘 같다. 이 백반에 오금 저리는 미각의 향연 같은 건 없다. 특별한 무엇이 아니라 그저 밥을 밥같이 먹고 싶을 때 가는 곳이다. 세 번에 한 번쯤은 계란 후라이를 하나 더 주십사 부탁하면서. 02-2269-0938


2 국수 - 대전 소나무집 오징어국수
이 집 김치를 그저 묵은지라 부르는 건 모독이다. 웬만한 신김치 고수도 일단은 긴장할‘비주얼’인 채, 오징어와 끓여 오징어를 먼저 건져 먹고 거기에 국수를 투하한다. 이미 신김치에 대한 편견조차 산산이 흩어진 후일 터, 삭힌 고추 양념이 삼삼하게 밴 국수가락은 젓가락을 대자마자 목까지 저절로 빨려 들어간다. 이 집을 못 가봤을 수는 있지만 한 번만 가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다. 042-256-1464


3 자장면 - 포천 미미향 자장면
묽다. 집에서 엄마가 ‘진미짜장’에 감자 숭덩 썰어 만들어 주시던 맛이 생각난다. 면을 다 먹으면 잘박하게, 소스가 아니라 국물이 남고 후루룩 그걸 마신다. 개운하다. 자장면을 먹으면 으레 밀려드는 과한 포만감이나 느끼함 등이 미미향 자장면엔 애시당초 없다. 31-531-4333


4 물냉면 - 서울 을지면옥 물냉면
을지면옥은 물냉면의 결론이다. 동치미 국물 같은 걸로 시원함을 위장하지 않는다. 을지면옥 육수엔 동치미의‘동’자도 안 들어가 있다. 돼지고기와 쇠고기를 섞어 끓인 을지면옥만의 육수뿐이다. 이 냉면엔 넘치게 더해진 것이 없다. 뭔가를 빼고 빼고 뺀 맛이다. 배가 부를 만큼 양이 많지만 속은 오히려 시원하게 비워진 것 같다. 02-2266-7052


5 떡볶이 - 금천시장 간장떡볶이
이 맛을 뭐라 말해야 할까? 하나 더 집어먹으면 알 수 있을까? 할머니는 수십 년 된 쇠주걱으로 떡을 뒤적이고 손님은 옆에 앉아 이쑤시개로 그걸 찍어 먹는다. 이 맛을 뭐라고 말해야 할까? 굳이 말해야 할까? 간장이 고추장보다 위대하다고 믿는 당신이라면, 지금 이걸 읽고 가만히 있을 일이 아니다. 경복궁역 쪽 금천시장 초입 오른쪽.


6 튀김 - 종로4가 노점 오징어튀김
기름에서 갓 건진 튀김은 기름 맛이 반이다. 튀김 맛의 본령은 살짝 식었을 때 나온다. 바삭거리기만 하다가 딱딱하게 굳는 튀김이 있고 식어도 말캉말캉 쫄깃한 튀김이 있다. 종로4가 노점의 오징어튀김은 후자다. 이 집은 오징어를 다리만 튀긴다. 말린 것을 쌀뜨물에 불려 옷 입히고 튀긴다. 야들야들하고 짭조름한 오징어 다리가 씹히다 말고 넘어간다. 종로4가 우리은행 앞.


7 참치 - 대치동 몰타참치 ‘진’
참치 간판을 버젓이 달고 새치만 들입다 파는 가게가 전국에 널렸다지만, 몰타참치 한 곳으로 모두를 용서할 수 있다. 그 부위 이름은 잊었지만 그 기름짐, 그 살점은 가슴에 남았다. 혀에는 남지 않는다. 모두 녹아버리니까. 소금과 얇게 저민 마늘과 무순과 생와사비를 얹은 오도로 한 점. 구름 같다. 02-508-7861


8 갈비탕 - 광장동 명월관 한우영양갈비탕
스테인리스 대접에 두둑히 퍼내던‘피로연 갈비탕’이 출장뷔페에 밀린 후, 갈비탕은 잊혀진 메뉴가 되었다. 곰탕 설렁탕집은따로 있어도 갈비탕집은 따로 없으니까. 워커힐 호텔 한식당 명월관의 한우영양갈비탕은 소 한 마리 먹은 것과 진배없는 육중한 포만감을 선사한다. 격이 달라 뺐겠지만 당면 한 젓가락이 들어있다면 완벽에 완벽을 더하는 것일텐데, 그건 또 아쉬운 대로의 맛일까? 02-450-4595


9 설렁탕 - 충신동 우미옥 설렁탕
설렁탕을 한 술 떠서 맛있으면 곧장 의심이 솟구친다. 뭘 탔나? 몇 술을 거푸 떠도 감이 안 잡히면 호기심이 생긴다. 이게 진짜였나? 우미옥 설렁탕은 그 호기심을 끝내 장중한 피날레로 맞아준다. 전혀 뿌옇지 않은 국물에 새콤하면서도 매운 내를 감추지 못한 고추간장을 휘휘 둘러 간하는데, 마약도 이보단 효과가 덜할 것이다. 아무리 집어먹어도 줄어들 줄 모르는 고깃점의 향연은 또 어떤가. 시원하다 못해 톡 쏘는 느낌까지 있는 김치에, 방송출연 같은 건 한사코 안 한다는 주인의 마음마저 제대로 우러난 국물 같은 곳. 02-744-5140


10 짬뽕 - 군산 쌍용반점 짬뽕
쌍용반점 이전의 짬뽕 국물은 오해받았다. 동조개와 바지락이 서른 개 넘게 들었다. 젓가락으로 동조개를 집으면 속물이 찍 나온다. 조개류는 철 따라 바뀐다. 새우를 넣고 끓이기도 한다. 이런 건 군산이니까 가능하다‘. 매콤’은 목구멍에 걸리고, ‘시원’은 식도를 타고 위까지 내려간다. 면을 다 먹고 국물이 식을 때쯤 따뜻한 밥을 반 공기만 말면, 유난히 많은 국물인데도 그릇 바닥이 썰물에 뻘 드러나듯 다 드러난다. 목구멍에 인이 박히도록, 그걸 다 먹으면 마셔 없애고 싶어진다. 군산은 너무 멀어, 또 언제 먹게 될지 모르는 거니까. 따로 주는 빈 그릇엔 조개껍질이 30여 개 쌓여 있었다. 063-443-1259


11 조개구이 - 태안 방포 모둠조개구이
“저는 우리 집이 태안 최고라고는 추천 못하겠어유.”사장님이 말했다. “왜죠?”“싱싱한 조개를 그냥 많이 드리는 것뿐이니까유.”하지만, 조개구이에 양과 청결 외에 다른 미덕이 있나? 연탄불에 구워먹는 방포 조개구이엔 모래가 안 씹힌다. 애꿎은 피자치즈나 양념으로 잔재주를 부리지도 않는다. 리필은 없다. 손님들은 알아서 다시 찾아온다. 조개의 구색은 계절 따라 달라진다. 태안 방포에서 조명 달고 호객하는 조개구이 집을 다 지나면, 방포 조개구이가 나온다. 안에는 현지인이 더 많다. 진짜 맛집은 다 이렇다. 041-674-3399


12 홍어삼합 - 목포 금메달식당 홍어삼합
금메달 식당엔 삭힌 흑산도 홍어 암모니아 냄새가 24년 동안 뱄다. 홍어, 돼지고기 수육, 묵은 김치를 한 젓가락에 집어 먹는다. 씹히는 건 홍어 뼈, 나머지는 두부를 씹는 것처럼 부드럽다. 돼지고기, 김치, 홍어 맛은 따로 놀지 않는다. 그 와중에 느껴지는 에멘탈? 생크림? 몇 가지 맛과 향이 불꽃놀이처럼 후두둑 왔다 간다. 씹다가 입으로 숨을 들이마시면 코와 가슴이 다 뚫린다. 삼키기 전엔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신다. 여기 삼합은 만들어 먹을 때마다 맛이 다르다. 마주 앉은 사람과는 차마 대화를 나누지 않았다. 061-272-2697


13 김치볶음밥 - 부산 풍년집 김치볶음밥
저녁 7시가 돼야 문을 여는 포장마차 풍년집엔 무쇠 프라이팬 하나가 제일 큰 자리를 차지한다. 주력 메뉴가 무려 김치볶음밥이다. 프라이팬에 김치와 삶은 당면을 잘게 썰고 볶다가, 단무지를 뺀 김밥을 듬성듬성 썰어 넣는다. 힘차게 섞으면 김밥이 김치볶음밥으로 변한다. 밥 위에 올릴 계란을 부치면서 주인 아주머니가 말한다“. 희한하게 사람들이 이거 마이 찾대.”기름이 좔좔 돌면서 침이 팍팍 솟는 맛인데 안 찾을 수 있을까? 눈으로만 봐도 맛있는 걸 알겠다. 광복동 명보당 앞.


14 소고기구이 - 왜관 약목식육식당 갈빗살
이집 갈빗살은 빠져 죽을 만큼의 육즙이나 지리산 눈꽃 같은 마블링, 참숯이니 구리석쇠니, 쇠고기깨나 먹어본 입들이 찬양하는‘하이엔드’는 아니다. 숭덩숭덩 썬 갈빗살을 검은 철판에 올리고는 시간 되면 뒤집고 시간 되면 또 뒤집어 먹는 그런 쇠고기다. 간이 완만하면서 매콤한 단맛이 도는 소스는 일품이고, 된장과 열무김치는 따로 메뉴를 만들어도 좋을 만큼 훌륭하다. 054-974-0232


15 삼겹살 - 한남동 나리의집 삼겹살
삼겹살은 태생부터 소주와 함께였음을 증명하는 집. 판판한 냉동 삼겹이야말로 삼겹살의 본령임을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가르쳐주는 집. 번호표를 받아도 지겹지 않은 집. 과식하고 후회하길 백 번도 더 하는 집. 나리의집. 02-793-4860


16 닭한마리 - 충신동 꼬꼬나라 닭한마리
숭숭 썬 부추에 고춧가루 양념, 식초, 간장, 겨자를 버무려 놓고 기다리면 떡점만 익은 상태의 냄비가 식탁으로 옮겨오고 떡점을 다 먹을 때쯤이면 고기가 다 익는다. 아까 무친 부추와 세상에 둘도 없을‘순결한’배추김치를 함께 먹는다. 마침내 국수까지 끓여 건져먹고도 숟갈질이 멈추지 않으니, 끝내 냄비를 들고 국물의 바닥을 본다. 편집부엔 이 집 닭한마리에 중독된 에디터가 이미 농구팀이다. 전화는 밤에만 받는다. 02- 747-9130


17 만두 - 을지로 오구반점 군만두
군만두는 군만두일 뿐 튀김만두일 수 없다. 과자처럼 부서지는 만두피를 바삭바삭하다고 칭송하는 건 군만두에게 미안한 일이다. 을지로 골목에 꼭 박찬욱 영화 세트장 같은 중국집이 있는데 그 이름이 오구반점이다. 여기 군만두는 만두의 양면 중 한쪽만 익힌 형태로 나온다. 그래서 다른 한쪽은 흡사 찐만두처럼 야들야들하다. 꽉 찬 속에서는‘쥬시한’즙이 흐르고 접시는 금세 비어 있다. 02-2267-0516


18 라면 - 이화동 레이스분식 라면
괜히 찌그러진 냄비 쓰는 집은 모두 진짜일까? 평범한 분식집 외관을 한 이 집 라면 맛의 핵심은 냄비를 삼킬 듯 솟아오른 불이다. 높은 온도에서 끓기 때문인지 생스프 냄새가 국물이 식을 때까지도 전혀 안 난다. IMF 때도 가스비는 안 아꼈다며 웃는 주인은 웬만한 단골의 취향까지 꿰고 있다. 그에 따라 물의 양과 익히는 정도도 배려한다. 라면은 신라면, 스프 외에는 송송 썬 파, 계란 하나, 고춧가루 양념 조금 그리고 라면만을 위해 시원하게 담근 김치. 새벽까지 영업한다. 02-765-7807


19 해물뚝배기 - 서귀포 삼보식당 오분작뚝배기
뚝배기보다 장맛이라고 했으니, 삼보식당 오분작 뚝배기를 두고 한 말이 아닌가. 또 장맛의 핵심은 형언할 수 없는‘깊은 맛’일 터, 그 또한 삼보식당 오분작뚝배기에 풀린 된장을 두고 한 말이다. 성게알 몽글몽글 얹힌 오분작을 한 점, 쿰쿰하기가 무찌를 자 없는 자리돔젓을 또 한 점, 머슴밥 한 숟갈. 끝. 땡. 게임오버, 디 엔드. 064-762-3620


20 콩국수 - 제주 남춘식당 콩국수
너무 진하다든지, 너무 묽다든지, 너무‘두유’스러운 단맛이 돈다든지, 콩 말고 깨나 잣 맛이 더 진하다든지, 수박이나 삶은 달걀 같은 기이한 고명을 얹는다든지…. 콩국수만큼 취향의 함정이 많이 도사리고 있는 요리도 드물다. 이 집 콩국수는 그저 콩국수다. 검은콩으로 만든 콩국물에 잘박잘박하게 담긴 면발, 돼지고기가 들어간 아주 특별하게 맛있는 김밥도 파는데 그걸 콩국물에 찍어 먹는 별미도 있다. 064-702-2588


에디터/ 장우철, 정우성, 손기은

이 식당들을 선정하기까지 많은 분들이 도움을 주었습니다.
박재은(요리 칼럼니스트),
최병준(경향신문 여행전문기자)
김성윤(조선일보 음식담당기자),
고형욱(요리 와인 칼럼니스트)
김노다(푸드 스타일리스트),
김은조(레스토랑 평가서 <블루리본 서베이>편집장),
강레오(셰프),
박상일(출판사‘수류산방’방장),
이보미(프리랜스 음식전문기자),
전우치(프리랜스 음식전문기자),
조경아( 컨트리뷰팅 에디터),
이정윤( 웹에디터),
김경임, 안영옥, 김경희(세 에디터들의 어머니)

 

 
(보다 자세한 내용은 지큐 6월호에 나와 있습니다.)

 

*
100 개의 테마로 가득 차 있는 지큐 100회 특집호에서
단연코 최고라고 꼽을 수 있는 100 그릇!!!
아, 어젯밤 배를 쥐어잡고 읽었다 ㅠ.ㅠ
먹어보지 못한 96 그릇을 죽기전에 꼭 먹어볼테다!

이 기사에 무한신뢰가 느껴지신다면 당장 사서 읽어보세요.
침 넘어가는 글발과 황홀한 비주얼에 쓰러집니다 ㅠ.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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