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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고/그냥

11월에는 필요해

by 하와이안걸 2015. 11. 25.

0. 숨가쁜 한달이었다.
탁상달력이 걸레가 될 정도였다. 



1. 다이어리가 필요해

대학 졸업 이후 다이어리와 담 쌓은 내가 커피빈 다이어리를 흘끔거리고,
토리버치 다이어리를 부록으로 주는 엘르 일본판를 들었다 놨다 들었다 놨다.
인터넷 교보문고에서 4만원 이상 구매하면 주는 다이어리 속지가 궁금해서 폭풍검색.

그러나 11월부터, 지금 당장 쓸 수 있는 다이어리를 원했기에 모두 탈락.
결국 마스다 미리의 신작 부록이 책보다 먼저 도착해서 열심히 쓰는 중이다.
알라딘 예약 구매자를 위한 스케줄러인데 기대 이상으로 너무 괜찮은거다.
단점? 물론 있다. 귀찮고 귀찮은 만년 다이어리라는 것... ㅜㅜ
아, 나의 빨간날이여. 음력이여. 세상 절기들이여!

마스다 미리 <평범한 나의 느긋한 작가생활>의 부록!



이번 다이어리에서는 무엇보다 위클리가 꼭 필요했다.
식단과 운동에 따른 몸 상태를 기록하기 위해서다.
즉, 잘 먹고 잘 자고 잘 싸기 위한 다이어리인 것이다.

이 모든 것은 똥의 저주로부터 시작되었다.
아, 어른의 똥이란 얼마나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하는지...
이렇게 귀찮은 일기를 쓰게 되는 날이 오고야 말았다.
트위터에 난무한 욕만 봐도, ㅅㅂ이라는 초성만 봐도 짜증이 나는 나같은 사람이 있듯이
사랑하는 여러분을 위해 똥 이야기는 오늘로 그만할 것을 약속드립니다.
하지만 관리하십시오. 그리고 기억하십시오. 
똥은 여러분과 한몸이었다는 사실을!



2. 운동이 필요해


운동은 주 5일 빡세게 하고 있지만 어떠한 변화도 없다.
난 그저 어리럼증이 사라진, 조금 건강해진 돼지일 뿐이다.
그래도 바쁜 11월, 빡침이 올 때마다 간식 대신 케틀벨을 찾는 내 모습을 본다.
'아이고 내 팔자야'를 외치며 케틀벨을 가뿐하게 들어올리는 것이다. (사실 케틀벨치고는 초경량;;) 
주의할 것은, 너무 가볍게 느껴지는 나머지 속도가 빨라지고 자세가 망가질 수 있다는 점.
실제로 멀쩡했던 허리가 아파와서 중단하고, 암워킹으로 갈아탄 적도 있었다.
암워킹을 하면 마음은 부처가 된다.
무거운 건 마음이 아니라 몸뚱아리였구나...
내 무게를 지탱하며 전진하는 어깨가 부서질 것 같은 고통을 느끼며, 오늘도 반성하고 반성한다.

하지만 여기에 옛날 CD를 틀면 조금은 마르고 어렸던, 이쁨 받던 시절이 떠올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된다.
그래도 나는 변비가 갓 사라진 돼지일 뿐이다.

아, 케틀벨 무게를 올리고 싶다.
실수로 무거운 거 산 사람과 맞교환하고 싶다.



3. 독서가 필요해


출판사의 북콘서트에 두 번이나 당첨 되었다.
그 중 한번은 페럼타워에서 있었던 유시민, 진중권, 김남희의 글쓰기 토크쇼.
정말 재미있었다. 준비도 많이 해오시고 워낙 책 자체가 똑 부러지다보니 자신감도 있으시고,
어쩜 사회까지 그리 잘 보시는지... 반하고 말았다. 
글을 잘 쓰기 위해서는 무조건 많이 읽어야 한다는 말이 몹시 찔렸지만, 
그러면 그런줄 알고 처읽어볼까 한다. 뭐, 이 정도의 카리스마?


너무 팬클럽스러운 관중의 호응이 약간 부끄럽고, '메시지만' 있는 오프닝 공연도 내 취향은 아니었지만
이 강연 그대로 녹화해서 다시 보아도 좋을 정도로 군더더기가 없는 행사였다.
굳이 옥의 티를 뽑자면 녹차 티백과 온수만을 제공했다는 점 정도? ㅋㅋㅋ
저녁도 굶고 두 시간을 집중하다보니 끝나자마자 사인도 마다하고 달려나왔는데
그날 밤 작가님은 밤샘토론에 나와서 대단한 활약을 하셨다. 아, 역시.  



좌로부터 김남희, 진중권, 유시민 선생님

유튜브, 팟캐스트로도 나온다고 하네요.



다른 한번은 마음산책 출판사 사옥에서 있었던 임경선 작가님과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만남.
서교동 산책하면서 한번은 지나쳤을 듯한 예쁜 양옥집이었다.
행사 전 사옥을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가정집을 개조했지만 신발을 벗지 않는 것이 좋았다.
책장에 꽂힌 사노 요코 시리즈를 보면서 질문들이 스쳐지나갔지만 꾹 참았다. 

대접은 푸짐했다. 직접 담근 모과차와 과일, 떡, 쿠키에 기념품과 행운권 추첨까지.  
이런 북콘서트에 익숙하신 작가님께서는 긴장한 어린양들을 스윽 한번 훑어보시고는 바로 질의응답으로 고고.
그동안의 에세이와는 확연히 다른 주제라 질문이 한결 정제된 느낌이었다.
지난 번 커피발전소에서 있었던 <태도에 관해서> 북토크와 비교해 보면
그때는 작은 카페의 아늑함 덕인지 정말 개인적인 질문이 막 쏟아져서 책 이야기를 거의 못했는데 말이다.
책에 대한 집중도는 이번이 나았지만 재미면에서는 아쉬웠다.  
서로의 얼굴이 너무 정확하게 보여서 마음을 열기에 시간이 필요했던 것 같고, 실제로 예열이 되었다 싶을 때 끝났다.
책의 다름도 있겠지만 개인적으로는 조명이 너무 환하지 않았나 싶다. 회의실 느낌?
앞에 놓은 음식도 편하게 먹을 수 없는 밝기였다. 중요한 분 모시고 회의할 때 덥석덥석 집어먹으면 부끄럽잖아요.


이게 바로 마당에서 수확한 모과로 만든 모과차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만남


4. 영화가 필요해

매월 마지막 주 수요일은 문화데이인지 무비데이인지 해서 18~20시 시작하는 모든 영화가 5천원이다.
어떤 극장은 21시까지도 5천원이던데 왜 그렇게 되는지는 잘 모르겠다.
회사 다닐 때는 그런 게 있는 지도 몰랐는데 쉬면서부터는 매달 챙기고 있다.


영화는 주로 내가 고르는 편. 남편과 취향이 미묘하게 다르지만
어차피 극장과 시간의 제한이 있어서 함께 볼만한 화제의 영화를 예매하게 된다.
그런 대중적인 영화들이 여러 시간대에 가장 많이 깔려있기도 하고.

그런데 지난 달에 작정하고 본 '하늘을 걷는 남자'는 힘들었다. 
잘 만든 영화인 것도 알겠고 조토끼도 연기 너무 잘한 거 정말 알겠는데 
겁 많은 나와 새 회사에 적응하느라 긴장한 남편에게는 맞지 않았던 것이다.
나는 없던 고소공포증이 생길 지경이었다. 아랫배가 아릿하게 아플 정도였으니까. 다시 생각만 해도 으아.
격무에 지친 남편은 조토끼의 미친 연기가 너무 실제 같아서 짜증이 났다고 한다. 100% 인정.
지금 생각해 보니 남편은 고소공포증도 살짝 있었다. 아이구야!

이번 달에는, 마침 남편 생일이 있는 달이기도 하고 해서 
남편이 좋아하는 시원하고 쎈 영화를 고르기로 했다. 내부자들이 1순위였다.
그런데 갑작스레 시댁 김장에 이틀이나 소환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그날로 나는 생일왕인 남편을 밀어내고 김장왕으로 등극하였다. 
나 김장왕은 이 피로를 안고 추악한 한국 사회의 현실을 맞닥뜨릴 자신이 없어져
당일날인 오늘, 영화의 장르를 환타지로 바꾸었다.

호소다 마모루의 신작 애니메이션 '괴물의 아이'와
왠지 부부 사이가 더 멀어질 듯한 '더 랍스터' 중에서 고민하다가 
남편 회사와 가까운 코엑스에서의 '더 랍스터'로 결정. 
오늘 밤, 김장왕의 요동치는 감정을 각오하라.





이젠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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