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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고/그냥

한약이 내게 준 것 1 : 없음

by 하와이안걸 2015. 10. 23.



여자에겐 흑염소라는 기적의 간증을 하도 들어서
이제 내 차례인가 싶은 마음에 강화에 계신 부모님께 흑염소 섭외를 부탁드렸다.
그리고 며칠 후, 건강원 할아버지가 나를 찾는다는 이유로 강제 소환;;;

신상정보와 사주를 탈탈 털리고
흑염소로 가기 전의 약을 거의 공짜로 구입.

크게 보고싶지도 않음 -_-


주성분이 마늘인 새알심 크기의 생약.
씹어먹다가 구토를 거듭한 뒤, 수저로 쪼개고 쪼개어 알약처럼 물로 넘기기를 일주일.
할아버지가 말한 몸의 변화는 도통 없고, 땀과 체취를 비롯한 나의 모든 부분이 마늘화 되어갔다.
숨만 쉬어도 마늘 냄새가 난다는 남편의 진단으로, 모든 약속을 취소하고 칩거하기를 열흘.
드디어 약은 졸업했지만 나에게 남은 건 쓰린 속과 오장육부에 스민 냄새.
당분간 지우기는 힘들겠지... (먼 산)

어미무시한 금식 리스트. 통일성 없는 것 좀 보라.


게다가 저 금식리스트를 다 지켰음에도 몸무게도 줄지 않는 미스테리 ㅠㅠ
마늘의 스태미나는 대체 어느 정도란 말이냐!!! ㅜㅜ

화가 끓고 부모님이 원망스럽지만
그래도 나에게 남은 깨달음이 있어 이를 정리하고자 한다.



1. (사진으로는 다 남기지 못했지만) 나름대로 다양한 어패류 식단을 완성했다.


혼자였으면 냉동실의 떡과 눌은밥 만으로도 충분했으나 나는 초딩 마흔에게 밥을 차려야하는 여자.
학식 영양사처럼 메뉴 개발이 절로 되더라 ㅠㅠ

회덮밥과 된장국 정식이요~

백선생 꽁치조림에 겉절이요~



2. 잉여력이 뻗쳐 집을 꾸미기 시작했다. 


지저분한 집에서 마늘 마눌이 되는 것은 싫었나보다. 
혼자 티비를 나르는 괴력에 각종 버리기 신공을 발휘하여
먼지 구덩이 속에서 집을 넓히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지독한 인후염에 걸려서 기침도 꼬박 열흘은 한 듯 ㅠㅠ

사실 이 모든 발단은 안방 커텐을 빨아볼까?에서 시작되었다.
커텐에서 블라인드로 관심이 옮겨간 후 중고나라를 통해 딱 맞는 블라인드를 2만원에 구매!
아아, 알루미늄 블라인드는 사랑입니다. 여러분 ㅠㅠㅠ


마늘과 싸워줄 로즈마리도 구입!

영화는 홍상수의 <다른 나라에서>

난생 처음 그림도 샀다요. 이케아에서 ㅋㅋ




3. 거듭되는 실험을 통해 내게 맞는 식습관을 찾아냈다.

- 나는 김치를 멀리해야 한다.
김치가 들어간 식사와 안들어간 식사의 몸무게 차이가 제법 났다. 김치를 좋아하는 나에게 무척 힘든 일이지만 지금부터 김치 중독에서 벗어나자.

- 무조건 꼭꼭 씹어먹어야 한다.
위가 약한 나에게 빨리 먹는 습관은 만병의 근원이다. 다른 장기에 골고루 들어가야할 에너지가 소화에 집중되어 있다는 여러 한의사의 조언이 다시금 와닿는 순간이었다.

- 좌욕을 매일 해야한다.
회사 다닐 때에는 일년에 한번씩 치질 목전까지 갔었다. 이번에도 바뀐 식습관과 독한 약 때문에 말도 못할 고생을 했는데, 좌욕만으로도 싹 낫는 신비한 경험을 했다.
나는 이런 걸로 수술대에 오르지 않을테야! 라는 인생의 새로운 목표!

- 고기와 밀가루는 알아서 먹자.
고기와 밀가루를 피하다보니 처음에는 살이 빠지는 것도 같았지만, 어차피 쌀밥을 먹고 생선을 이틀마다 먹으니 달라지는 건 없었다. 탄수화물이냐 뭐냐 보다는 소금간이 제일 중요한 것 같다.

- 우유, 계란은 안먹어도 괜찮은 듯?
이 두 개를 피하는게 사실 제일 힘들었다. 사랑하는 유제품, 사랑하는 계란 요리... 그런데 생각보다 금방 잊혀지는게 신기했다. 없어도 아무렇지도 않고 오히려 몸이 좀 더 가벼워진 느낌이다.  

지금 생각나는 건 이 정도인데 계속 생각나겠지.

여튼 그래서 지금 가장 먹고 싶은 것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그건 고기도 우유도 계란도 빵도 아닌

짜장면과 라면.

두둥.

네. 나는 그런 여자에요. 
미쳤지요. 다 소용 없다구요. 
으아아아어어어어어러아앙허ㅓ어헝 ㅠㅠㅠㅠㅠㅠ


(울면서 뛰쳐나간다.)




이젠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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