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트가 아니고 레트로!
솔직히. '까만 안경'의 성공은 운이었다고 생각했다. 비슷 비슷한 발라드의 홍수 속에 어지간히도 튀는 뽕끼. (신선했겠지.) 알고 보니 그 곡은 '어머나'의 윤명선 작곡이라고. (아, 그래?) 어느 정도 차트에 오른 후에는 태사장님이 밀어줬겠지. (어쩐지 자주 들리더라.) 뭐. 다정한 부자간의 모습은 확실히 보기 좋았지만 말이다. 활짝 웃는 태진아 아저씨를 보니 혈육도 아닌데 괜히 찡해오고 말이지. 하지만 이 냉정한 가요계에 운은 두 번 이상 오지 않는다. 마치 자기 노래를 표절한 것처럼 너무 비슷한 분위기(게다가 같은 작곡가;)로 컴백하기만 해봐라.그만큼 한심해 보이는 게 없다고!물론 어느 정도 인기는 끌겠지만 앞날이 창창한 젊은 친구가 그러면 안되지. 그런데 타이틀곡 '둘이라서'의 작곡가를 보니 살짝 안심이 된다. 락 그룹 모던쥬스의 MINUKI. 기대치 상승! 하지만 들어보니 당황스럽다. 어이쿠. 이 분 이런 발라드도 쓰시는구나;;; 다행히 편곡에 공을 들인데다 이루 본인도 '까만 안경' 때보다 담백하게 불러준 덕에 뽕발라드의 답습이라는 비판은 면할 수 있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 이 앨범에서 가장 반가운 트랙은 다름 아닌 하광훈이 작곡한 '겨울나기'와 김태원이 작곡한 '사랑이라는 슬픈 얘기'다. 그 옛날 이승철과 변진섭이 발라드로 날리고 있을 때 그들의 뒤에는 각각 김태원과 하광훈이 있었다. (물론 지근식도 있었고, 박광현도 있었고 이승철은 자작곡도 많았지요. 네네.) 그 둘의 발라드는 악보를 보며 설명할 수는 없지만 확실히 달랐다. 부활 시절의 락발라드를 조금 더 대중적으로 다듬어 놓은 이승철 1집은 지금 불러도 손색없을 정도로 세련미가 넘쳤다. 반면에 정통 발라드를 고집하던 변진섭 1집은 지금 듣기에는 약간 촌스럽지만 따뜻하면서 솔직했고. 작곡가의 성향 뿐만 아니라 창법도 완전 달랐던 두 사람은 90년대 초반 발라드계의 강력한 라이벌. 그런데 이 두 작곡가가 20년 가까이 살아남아 (죄송합니다;) 2007년대의 젊은 가수에게 곡을 준 것이다. 결과는 기대 이상!
겨울 느낌을 물씬 살린 따뜻한 종소리가 인상적인'겨울나기'는 하광훈의 작품. 살짝 에코를 넣어준 이루의 미성이 살짝 촌스럽지만 나름 귀엽고 짠하다. 역시 하광훈이 작곡한 조관우의 '겨울이야기', '다시 내게로 돌아와'가 떠오르는 이 곡은 지금보다 더 추워지면 반드시 사랑받을 트랙으로 보인다. 나이스 초이스 하광훈! 그의 이름이 '젊어진 트로트'로 빠질 뻔한 이 앨범을 살렸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리고 부활의 김태원 작곡한'사랑이라는 슬픈 얘기'. 피아노에서 현악으로 이어지는 웅장한 편곡에 이루의 깜짝 놀랄만큼 성숙한 보컬이 인상적이다. 한 편의 시와 같으면서도 부르는 맛을 최대한 살린 김태원의 내공있는 노랫말도 굿! 제대로 스트링을 쓴 정말 오랜만에 들어보는 클래시컬한 발라드다.
또한 후속곡으로 유력시 되고 있는'마네킹' 또한 귀를 사로잡는다. '워우워우워' -> 이 한 마디로 피쳐링에 이름을 올린 환희의 존재감 넘치는 보컬이 특히 인상적. 그 외에도 이주호, 최준영, 신사동호랭이 등 인기 작곡가들이 자신의 색을 감추고 이루에게 맞는 발라드 곡을 선사했다. 듣기 편한 발라드로 꽉 찬 앨범이지만 역시 11곡을 다 구별하려면 시간이 걸릴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댄스까지는 아니더라도 리드미컬한 R&B 정도는 두어곡 들어가 줬음 싶었지만 기사를 보니 구색 맞추려는 트랙은 싫다며 '본인의 강력한 의지로' 발라드만 채웠다고 한다. 깨갱.
전국을 강타한 레트로의 열풍. 그것은 원더걸스만의 것이 아니었다. 하광훈과 김태원. 그들의 내공과 이루의 현명한 판단으로 그의 3집은 진정한 8,90년대 발라드의 완벽한 재연이라는 또 다른 축포를 터뜨렸다. 그리고 나는 두 번이나 허를 찔렸다. 어이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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