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착은 집착을 낳고
2006년 최고의 음반으로 선정된 3집 [Healing Process] 이후 1년 6개월 만에 4집 정규 앨범으로 다시 돌아온 넬(Nell). 앨범명 [Separation Anxiety]를 사전으로 찾아보니 심리학 용어로, 유아가 어머니로부터 분리될 때의 심리 상태을 뜻하는 '분리 불안'이라는 뜻이다. 허상이 아닌, 언제나 뚜렷한 대상이 있는 듯 리얼하고 지독한 사랑을 노래했던 그들이기에 이런 타이틀이 낯설거나 의아하지 않다. 앨범과 같은 타이틀을 달고 있는 첫 곡 'Separation Anxiety'에서 이러한 앨범 전체의 성격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약 20여회 집요하게 반복하는 '나를 떠나지 마요'라는 노랫말은 앨범의 주제를, 황량함이 느껴지는 전자음은 일렉트로니카 장르를 어떻게 사용하면 '넬 화' 시킬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듯 하다. 그러나 압박이 느껴지는 곡 제목과는 달리 처절하지 않은 담백함이 먼저 느껴지는 것 또한 달라진 점 중 하나. 이어지는 'Moonlight Punch Romance' 또한 예상을 깨는 장르의 곡으로 어쿠스틱 기타에 맞추어 부르는 사랑 넘치는 나른한 러브송이다.
단조로운 건반 소리와 '아직도..' 하는 나지막한 음성으로 시작하는 '기억을 걷는 시간'은 이 앨범의 타이틀곡. 은근하게 맞아 떨어지는 운율과 빠르게 읊조리는 가사가 강하지 않은 세 번째 타석 임에도 불구하고 지루함 전혀 없이 계속 귀를 기울이게 된다. 슬픔을 누른 채 부르고 있지만 언제 어디서 터질지 모르는 보컬의 호흡에 오히려 숨 막히는 초조함이 다가올 뿐. '내일도 너를 보겠죠, 너를 듣겠죠' 와 같은 흔히 있을 법한 상황 설정도 공감이 간다. 그래. 헤어져도 매일 봐야하는 거지같은 경우도 있지. 그러니 '어떤가요? 그대'하고 물을 법도 하고. 다행인지 (아닌지) 절정에서 '빠방~!' 하고 폭발하진 않았지만 코러스에서 울부짖는 보컬만으로도 커다란 미련과 슬픔이 느껴진다.
'분리 불안'의 근원을 보여주는 듯한 곡으로 'Afterglow' 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이 곡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말로 할 수 있는 모든 사랑의 표현을 끝도 없이 내뱉는 곡으로 3집의 '섬'과 같은 배경,과 대상이지 싶은 기분까지 든다. 사랑의 표현이긴 하지만 달콤하다기 보다는 절실하고, 끝도 없이 운명을 강조하는 모습이 듣는 사람에 따라서는 조금은 부담스러울 수 있는 고백. 예를 들자면 오랫동안 머물러줘, 뼈 속까지 좋아하고 간절해, 꼭 붙잡고 놓지마요, 공기만큼 절실하고 필요해, 부디 함께 호흡해 등이 그렇다. 그러나 죽기 전에 '진심이었고 소중했다'고 말해달라는 간절한 부탁은 눈물이 날 지경이다. ㅠ.ㅠ 세상에 수 많은 사랑 노래가 있고 그보다 더 많은 고백의 순간들이 있겠지만 감동을 주는 것은 단 하나, 모두의 경험을 관통하는 진심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순간이다.
다소 늘어진 흐름을 딛고 일어나는 빠른 템포의 'Promise Me'는 강한 의지를 보이는 노랫말이 힘 있는 연주를 타고 효과적으로 전달되는 곡이다. 타이틀곡이 말랑하다 싶은 팬들에게 지지를 받지 않을까 싶은 곡으로, 특히 마지막 3분 30초께의 그 숨막히는 정지 & 'Promise Me' 는 가히 압권! 또한 '12 Seconds'에서는 죽도록 높은 가성으로 외치는 보컬과 유리 파편처럼 부서지는 연주들이 섬세하고 화려한 넬의 우울을 그대로 느낄 수 있다. 가사가 들리지 않는 어려움이 있지만.. ㅠ.ㅠ 피아노 반주에 맞추어 마음껏 허우적거릴 수 있는 곡 '멀어지다' 또한 넬의 예전 스타일을 그리워한 팬들이라면 반가워할 트랙.
첫 트랙 후 잠시 멈춘듯한 넬의 새로운 시도는 'Tokyo'에서 작렬한다. 80년대 복고 사운드를 자신들만의 스타일로 새롭게 조화를 부린 이 곡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는 것이 바로 김종완의 폭 넓은 보컬. 고운 가성으로 부르는 유로 댄스, 신디팝이 전혀 어색스럽지가 않고 오히려 반짝반짝 합니다요. 여기저기서 락 스피릿 충만한 열혈 신도들의 아우성이 들리긴 하지만, 내겐 왜 제목이 도쿄인지 궁금한데 가사가 영어라 알 수 없는 아쉬움이 백배 더 크다. ㅠ.ㅠ 이런한 신디 사운드는 'Fisheye Lens'에서도 만날 수 있다. 제목처럼 해저 탐험을 하는 듯한 신비로운 사운드, 그러나 가사에서는 '모든게 사라지는 오늘을 기억해둬', 'It's all breaking down' 등 알 듯 모를 듯한 분위기가 그들의 신비주의에 오리발을 달아주는 곡이다.
마지막 곡 답다.. 싶은 경건한 전자 오르간까지는 좋았는데 난데없이 아기 보살이 씌운 듯 변환된 그의 목소리에 깜딱 놀라버린 트랙 '_'. 저 언더바가 무얼 뜻하는지 궁금하기도 전에... 무서워! 너무 무서워! 잘 불러서 더욱 무서워! ㅠ.ㅠ 어쨌든 다음 앨범을 기대하게 하는 저 오묘한 마지막 곡으로 대미를 장식하는 이 앨범은 지금까지의 넬을 바탕으로 달라진 모습까지 훌륭하게 조합한 앨범이라고 생각한다. 폭발력이 없다며 아쉬워하는 팬들도 있는데, 골백번 말하지만 어디 하루 이틀 장사하나. 그들의 연주와 보컬 안에 총알은 두둑한 것을, 왜 이리 집착하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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