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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눌러앉기/2004-2006, Japan

감기, 시말서, 최악의 하루

by 하와이안걸 2005. 5. 5.
5월 5일. 저녁근무. 어린이날.

감기에 걸려버렸다. 목소리도 장난아니고 입맛도 없고 그야말로 최악의 컨디션.
다행히 오늘은 마키가 있는 반찬쪽이었다. 마키랑 떠들면서 일하면 시간도 금방 가겠지.
그러나 그렇지 못했다. ;;; 센베코너로, 아이란도로 쉴새없이 불려가 헤르파(helper ㅡ.ㅡ)가 되어야했다.

오늘은 일본도 어린이날. 어린이를 데리고 유원지나 동물원에를 가야지 왜 공항에 오냐고!
정말 사람이 많았다. 골든위크는 골든위크인가보다.
아이들은 시식용 센베를 먹겠다며 진열장을 기어오르려했고
부모들은 야단을 치는 것도, 일으켜세워 먹이는 것도 아닌 애매한 태도로 우리를 당황스럽게 했다.
처음에는 시식용 센베를 사람들이 먹든 말든 아무 관심이 없었는데
요즘에는 그것조차 마구 눈에 거슬린다;;; 딱 보면 정말 보인다.
살 사람, 안 살 사람, 눈치보며 제일 싼거 하나 살 사람...

그렇게 나쁜 맘을 먹어서 그런가, 급기야 사고를 치고야 말았다.
손으로 쓰는 영수증을 부탁받았는데 매우 오랜만인 "두 번째" 해보는 것이어서
순간 긴장했지만 혼자 고집으로 써서 주었다. 그게 화근이었다.
먹지 뒷장을 주어야하는데 앞장을 줘버린 것이다. 어떡하지..
그 때 만만한 하타노가 지나가길래 상황을 설명했다. 그때까지만 해도 뭐 별건가 했다.
앞장이나 뒷장이나 내용은 똑같고, 내 인감도 제대로 찍어줬는데 뭘..
그러나 하타노 표정은 굳어졌다.

"음. 이상.. 이건 내가 어떻게 해줄수가 없는 문제인거 같은데.."
"네? 그럼 어떡해요???"
"위에다 직접 보고하는게 좋겠어. 어쩜 시말서도 써야할지 몰라."
".........."
"왜 그런거야. 확실하지 않으면 물어봤어야지."

조장언니에게 보고를 해야한다니... 아, 락커 열쇠 잊어버린 이후 간만에 눈앞이 노래졌다.
얼굴에 열이 확 올랐다. 마침 저 멀리 조장언니와 눈이 마주쳤다.
손가락을 까딱까딱하며 나를 부르는 그 분;;;

"이상. 이번 주부터 고구마양갱에 유료로 보냉제를 넣어주는거 알고 있지?"
"네."
"손님한테 어떻게 설명해줘야할지 생각해봤어?"
"네???"
"한 번 팔아봐. 뒤에서 보고 있을테니까..."

주저앉을 것만 같았다. 양갱은 내가 새벽 근무일 때만 한두시간씩 파는 것인데
요즘 계속 저녁 근무여서 전혀 살펴보지 않았다.
게다가 성수기라 양갱회사 전 직원이 파견되어 팔고있다는 걸 알기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난감한 내 표정을 읽은 조장언니는 몇 번 시범을 보이더니
왜 게시판에 붙여놓은 공지사항을 읽지 않느냐며 혼을 냈다.

"이상. 설마 미팅 때 내가 하는 말을 아직도 못 알아 듣는거야?"

충격. 아픈데를 정통으로 찔린 기분.

"일단 돌아가고 내일까지 완벽하게 연습해 와. 얼굴 펴고!!"

폐점 업무를 하는데 몸이 완전 녹초가 되었다.
기침은 계속 나오고 열도 나고 머리는 깨질 듯 아팠다.
누가 등만 쳐주면 바로 토할 것만 같았다.
그 때 도노시로(登野城) 아줌마가 말을 걸었다.

"이상. 몸이 안좋아?"
"네.. 감기에 걸린거 같아요."
"이상. 둘이 있을 때라 말하는건데.. 요즘 이상의 숨이 심상치가 않아."
"네???"
"몸 아픈 환자들이 내뱉는 숨 같아."
"그 말은.. 입에서 나쁜 냄새가 난다는 뜻인가요?"
"음. 꼭 그런건 아닌데.. 입냄새랑은 좀 다른.. 몸 안쪽이 안좋아서 나오는 나쁜 숨..
아, 어떻게 설명해야하지? 여튼 감기 말고 다른 장기가 나쁜 건 아니지?"
"네. 감기 말고는 별로.."
"음. 걱정되네.. 타지에서 건강 나빠지면 큰일인데.."

고맙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고, 서럽기도 하고..
환자의 나쁜 숨이라는게 뭔지는 몰라도 그 말을 들으니 바로 병원에 입원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폐점 후 조장언니에게 오늘의 실수를 보고했다.
예상했던 대로 조장언니는 아주 크게 한숨을 쉬더니 보고서를 써 오라고 했다.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내일 나오는 날이지? 오후에 한가하면 영수증 쓰는 것 확실하게 다시 해보자.
그리고! 울 것 같은 표정 좀 하지말고!"

피폐하기 그지 없는;; 내 모습 때문인지 생각보다 많이 혼나지는 않았지만 내 기분은 완전 바닥이었다.
주위에서는 내 상황을 모두 알아버린 듯 했으나 다들 모른척해주었다. 한 사람만 빼고. ;;;

"이상. 말했어? 말했어? 뭐래? 시말서 쓰래지? 거봐. 내 말이 맞지?"
"....."
"그게 왜 문제가 되느냐면 뒷장에 공항 직인이 있어서 앞장만으로는 효력이 없어서
어쩌면 내일 클레임이 들어올지도 모르고... 어? 울었어? 그런거야???"
"ㅡ.ㅡ+"

집에 가는 전철안에서 정말 울었다. 2월 초. 연수마치고 돌아가던 길처럼.
머리도 아프고, 속도 아프고, 눈물은 자꾸만 났다.




이젠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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