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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눌러앉기/2004-2006, Japan

레지사고 3550엔

by 하와이안걸 2005. 3. 27.
3월 27일. 새벽 근무.


이틀연속 새벽 근무에 정신까지 혼미해진 일요일 오전. 의외로 한가했던 센베코너를 고바야시와 함께 지켰다.
얘도 오늘은 심심했는지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다. 일본어 표현도 고쳐주고..

점심시간에는 위상과 간만에 이야기를 했다. 곧 한상도 그만두는데 밥 한번 먹자는 이야기,
지난 번 나 쉬는 날 일어난 레지사고 때문에 보고서 쓴 이야기 등등..
그래도 왠지 어색한 분위기. 어쩐지 다시 친해지기에는 늦어버린 것 같은...

"이상도 마음놓지마. 보고서 곧 쓰게될거야!"

말이 씨가 된다더니 그녀의 마지막 한마디가 제대로 확 꽂혀버렸다.
진짜 레지사고가 난 것이다. ㅡ.ㅡ;;; 마이너스 3,550엔.

2시 15분. 퇴근을 위해 서두르며 타임카드를 꺼내던 나는 조용히 비상계단으로 불려갔다.
그 곳에는 조장언니를 비롯 몇명의 사원들이 오전 동안의 기다란 영수증을 펼쳐놓고 하나하나 살펴보고 있었다.
아, 이런 곳에서 보는거였구나. 이런 광경이었구나.

"이상 미안한데 이상이 쓰던 7번 레지에서 마이나스가 나서 좀 봐줘야겠어."

곧 고바야시도 불려왔다. 둘 다 절대 아니라고, 오전 내내 취소 및 교환 아무것도 없었고,
진짜 한가했다고 말했지만, 가장 많이 쓴 사람들이라 조사에 협조해줘야한다는 이야기만 들었다.

7번 레지를 찍은 여러 사원들이 하나둘씩 불려왔다 나가는 동안 옆에서 가만히 붙잡혀 있었다.
두 시간 동안... 그리고 취소 한 건만 나와주면 얼마나 좋을까,하며 내 눈치를 살피는 사원들...

모두들 취소한 적 없다고 대답하며 나갔고, 사원들은 모두 넋이 나가버렸다.
그 중 한 사원은 영수증을 보면서 계산기를 자꾸 두드리고 있었다.
어떻게하면 마이나스 3,350엔이 되는지 연속된 서너개의 판매기록을 조합해가며 연구하는 중이었다;;;
이런 식으로 사원 하나가 시나리오를 여러 개 짜고, 그 경우의 수에 재수없게 걸리면 하루종일 시달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금액은 내가 생각해도 나올 수 없는 이상한 금액이고, 당연히 시나리오도 나오지 않았다. 그런데 갑자기...

"나왔다! 3,550엔!!!"

사원들은 몰려들었고, 난 왠지 예감이 안좋았다.

"이 세 개의 연속 판매를 보면, 여기서 첫 번째 손님이 이 물건을 취소했을 경우에...
두 번째 손님이 이 물건을 샀는데, 다시 와서 이 물건을 취소하고... 이걸로 교환을 하면... 3,550엔이 나와요!"

"스고이! 스고이!!!"

사원들은 감탄했고, 곧 '누구야 누구야' 하며 그 연속판매의 주인공을 뒤지기 시작했다.

"이상!!!!!"

털이 쭈뼛;;했다. 그러나 정신 바짝 차려야했다. 이들의 설명에는 두 가지의 전제가 따르는데,
첫째는 첫 번째 3천엔 상품이 취소 즉 반품이 되어야한다는 것이고,
둘째는 두 번째 손님과 세 번째 손님이 같은 사람이어야 한다는 것.

매우 흔치 않은 경우고, 정말 일어난 일이라면 당연히 기억이 날만했지만, 그들에겐 유감스럽게도 난 "절대" 아니었다.

오늘 물건 취소해달라는 손님은 멩세코 한명도 없었고 (그건 고바야시도 인정했다.)
같은 손님이 연달아 두번 계산한 경우도 없었다. 게다가 그들이 짚은 2, 3번째 손님은 전혀 다른 사람들로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두 번째 천연센베 손님은 초등학생 정도의 여자애랑 같이 와서 기억하구요,
세 번째 천연센베 손님은 남자였고 부드러운 센베를 찾는다고 해서 고바야시군 한테 추천해달라고
부탁까지해서 확실히 기억하고 있어요."

사원들은 '아니네'하면서 실망했고, 다시 축축 늘어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뚱땡이 다카하시만은 계속 내 표정을
끝까지 관찰했다. 너무너무 졸립고 피곤했지만 그녀의 눈빛을 의식하느라 계속 또릿또릿한 척 해야했다. 괴로웠다.

그들은 요즘 사고가 많았던 오오츠카 아줌마와 유일한 시나리오의 주인공인 나를 의심하는 듯 했다.
그러나 오오츠카 아줌마는 펄펄 뛰며 '오늘만은' 절대 아니라며; 믿어달라고 조장언니 손을 부여잡았다.
다카하시는 오오츠카 아줌마도 열라 보려보았다;;;

나 밥 먹으러간 동안 은근히 많이 찍은 미야자와도 불려왔다.

"미야자와상. 일하는 도중에 불러서 미안하지만 오늘 레지사고가 나서..."

조장언니의 힘없는 목소리에 미야자와는 갑자기 발끈하며 소리쳤다.

"그런 눈으로 보지 마요. 괜히 불안하고 기분 나빠질라 그래!"

난 내 귀를 의심했다;;; 아니, 저 애는 도대체.. 세상 무서운게 있긴 한걸까. 더 놀라운건 조장언니의 반응.

"아, 미안. 미안해. 내가 지금 너무 피곤해서 그래. 미야자와가 그랬다는 뜻이 아니었어.
그냥 한번 확인해달라는거지..."

조장언니가 좀 찐하게 생겨서 눈이 풀리면 진짜 기분 나쁜 눈빛이 되긴 한다;;;
그러나 사고가 생기면 원래 모두가 의심받는 법, 하여간 유난을 떨기는 -.-;;;

그러나 난 그녀의 행동에서 배운것이 있었다. 내가 아니면 아니라고 당당하게 말하면 얘네는 쫄아서
더 이상 아무말도 못하는 것 같았다. 그 동안 괜히 쫄아서 불안한 표정으로 모르겠다, 기억 안난다,
이런 식으로만 말했던 나. 괜히 길게 말했다가 문법에 안맞을까 걱정되어 상세히 설명하지 못했던 나.
너무너무 후회되었다. 오늘은 그나마 길게 말했지만 이걸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자꾸 맴돌았다.

결국 아무런 해답을 찾지 못하고 사건은 일단 종료되었다. 그리고 나는 풀려났다;;; 4시 30분.
너무너무 피곤하고 기분 나빴다. 내일 쉬는 날이라는게 다행스럽기도 하고 불안하기도 했다.

집에 오는 길에 맥주를 샀다. 김짱과 오랜만에 저녁을 먹으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했다.
타로카드를 뽑았더니 과연 척척 맞아떨어졌다. ;;;

'겉으로만 친한 척 하는 도움 안되는 친구들에 둘러싸인 위험한 상태입니다.'

앞으로 어떻게 해야할까 김짱에게 주절주절거리다 깊이 잠이 들었다.





이젠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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