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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을 걷고/허기진 마음

너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by 하와이안걸 2008. 6. 13.


나의 이름이라는 주제로 작문을 해오라는 숙제가 있었다. 열살 아니면 열한 살 때였을 것이다. 집으로 돌아가 내 이름의 뜻에 대해 물어보자 엄마는, 네가 태어났던 게 봄이었으니까 봄 춘(春)자에 아들 자(子)자를 써서 하루코(春子)라고 지은거란다, 라고 정말 맥빠지는 대답을 해 주었다. 그 때문에 나는 원래부터 별로 맘에 들지 않았던 이름이 더욱 싫어졌다.

......

남편의 이름도 나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평범한 노리오(典夫)였다. 사귀고 얼마 되지 않았을 때, 이름의 유래가 뭐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남편의 아버지는 노리유키, 할아버지는 노리시게, 즉 남편의 집안에서는 대대로 남자에게 노리(典) 자를 붙이는 모양이었다. 나는 나만큼이나 간단한 그 유래에 웃고 말았다. 이 사람과 결혼해도 괜찮겠다고 생각한 것은 아마 그 때였던 것 같다. 왠지 모르게 서로 잘 맞을 것 같다고 느꼈던 것이다. 이름이, 아니 그보다 그 이름이 표현하고 있는 우리들의 평범함이.

......

우리들은 매일 밤마다 이름 책을 뒤적이면서, 이것도 별로야, 저것도 별로야 하고 잠이 올 때까지 이야기를 나눈다, 심지어는 싸울 때도 있다. 둘만 있을 때는 싸우는 것조차도 귀찮았었는데. 엄마가 임산부용 복대와 함께 낡은 인명사전을 보내온 것은 임신 육 개월째로 접어들었을 때였다.

......

"벚꽃......" 하고 나도 모르게 내뱉었다.

......

어쩌면 이렇게 아름다울까. 뒷좌석에서 나는 멍하니 그렇게 생각했다. 몇 번이고 지나다녔던 길이다. 혼자서, 혹은 남편과 둘이서. 그런데 나는 여태껏 무얼 보고 있었던 걸까. 혹시 눈을 감고 걸어다녔던게 아닐까. 두 눈을 뜨고 있었다면, 이렇게나 아름다운 세계가 보였을텐데. 하루코. 그래, 하루코. 엄마가 나를 낳기 위해 달려갔던 길도 이렇게 모든 것이 봄이었겠지. 아, 봄이구나. 하고 배를 쓰다듬으며 엄마는 생각했겠지. 나는 세상이 이렇게 선명하게 빛나기 시작하는 때에 아기를 낳는구나.

......

조금만 더 기다려. 세상 밖으로 나오려하는 누군가를 향해 나는 말했다. 조금만 더 기다리렴. 너에게 어울리는 이름을 생각하는 중이야. 오직 너에게만 어울리는 이름을, 아직 생각중이란다. 강과 봄을 닮고, 빛과 태양을 닮고, 세상에 도움이 되고 의지가 되고, 건강하고 사랑받을 수 있는 그런 이름. 아니, 그런 의미 같은 건 하나도 없어도 괜찮아. 누구나 너를 너라고 인정해줄 수 있는 이름이라면.
 



- 가쿠다 미쓰요(角田光代), 프레젠트 中 [이름]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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