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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눌러앉기/2004-2006, Japan

야구장은 언제나 즐거워.

by 하와이안걸 2005. 9. 19.
9월 19일. 맑음. 휴일. 


쨍쨍한 햇볕에 지고 말았다. 억지로 일어나서는 할 일을 찾아본다.
등줄기에 땀이 흐른다. 9월 중순이 넘어가는데도 동경은 아직도 여름이다. ㅠ.ㅠ
밥 맛도 없고, 이불개기도 귀찮다.

티비에서는 이병헌 심은하 주연의 '아름다운 그녀'를 해주고 있다.
97년작. 심은하가 아름답지 않으면 어떡하나 걱정했는데 역시나 나의 기우.
그녀는 그 옛날에도 놀랍도록 세련되고 아름다웠다.
설득력있는 저 타이틀에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점심 때까지 빈둥빈둥 거리다가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고상이 야구장 티켓이 생겼는데 남편이 몸살나서 썩히게 생겼다는거다.
장소는 도쿄돔. 자이언츠와 야쿠르트의 경기.
무조건 간다고 하고 부랴부랴 표 받으러 공항으로 향했다.
가는 길에 언니가 좋아하는 찹쌀떡을 몇 개 사들고...

티켓을 받아드니 4시 40분. 경기는 6시에 시작.
타이밍은 제대로인데 과연 누구랑 같이 갈 수 있을까?
오늘은 경로의 날;;로 일본에서는 공휴일, 공항은 여행갔다 돌아오는 사람들로 북적댔다.
마키는 지금 고향인 미에현에 있고, 그나마 같이 가자고 할 만한 사람들은 다들 매장에 붙어있었다.
쩝... 근데 어차피 오늘, 혼자 슬슬 돌아다니다 카페에 들어가서 시간 죽이기로 했잖아?
카페 대신 야구장에서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자리도 보아하니 괜찮은 듯 하고. 여튼 썩힐 표는 확실히 아니었다.

역시나, 문자 보낸 모두에게 안 되겠다는 답장이 돌아왔다.
살짝 무안한 마음을 안고 홀로 도쿄돔으로 향했다.
역 근처에는 각종 패스트푸드 점들이 늘어서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그냥 지나치지 못했으리라. 예의상 뭐든 한봉다리 가슴에 품고 가야했지만
그러나 아침에 쓱싹 해 먹은 비빔밥이 속에서 살짝 부대끼는 것이 그냥 굶는게 좋을 듯했다.
게다가 이 티켓에는 도시락 10프로 쿠폰도 붙어있지 않은가!
출출해지면 저 안에서 파는 도시락을 사 먹어 보는거야!!!

아, 드디어 도쿄돔에 발을 딛다. (감격) 주위에는 놀이기구들이 붕붕 날아다녔다.
한쪽에서는 분수가 퐁퐁퐁, 다른 한쪽에서는 쇼핑가가 좌악!
해는 슬슬 지기 시작해서 노을이 퍼져있고 연인들은 점점 몰려들었다.
나는 뱅뱅 주위 사진을 찍고는 들뜬 마음으로 입장하였다. (패트병 하나 뺏기고;;)

아, 돔구장이 이렇게 생겼구나... 뜀틀 매트 같은 것이 천장에 다닥다닥 붙어있었다.
내 자리는 2층 맨 앞좌석. 발을 쭉 뻗어 벽에 붙이고 볼 수도 있었다. (다행히 닿았다;;)
그러나 행복은 잠시, 양 옆으로 혼자보는 아저씨들이 입장하시면서 분위기는 칙칙해졌다.
여기도 마찬가지였다. 알콜을 옆에 끼고 시합 내내 중얼거리면서 보는 아저씨들이 많았다.
게다가 내 옆에 아저씨는 어찌나 많이 군것질을 하시는지
쓰레기가 너무 쌓여서 다닐 수가 없을 정도였다.
경기 시작하고 눈치 좀 봐서 자리 좀 옮겨야겠다, 생각했다.

여섯시 정각. 시합은 시작되었다. 우리 나라와 다르지 않은 외야의 응원 분위기와 치어리더 언니들,
그리고 전광판의 홈팀 광고들... 문득 나의 엘지 트윈스에 대한 그리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재현씨.. 병규씨.. 용택이.. 광삼이.. 아, 다들 보고싶어요. ㅠ.ㅠ
그러나 그 애틋한 분위기도 옆자리 아저씨의 친구분까지 합세하시면서;; 홀딱 깨졌다.
나는 미련없이 밖으로 나가버렸다. 뭘 좀 사먹을까 두리번거렸더니 도시락이 1500엔이나 한다.
10프로 할인으로는 택도 없겠다. 아, 생각할 수록 화가 나네. ;;;
어제 그렇게 감동하며 좋아라했던 씨즐러 샐러드바도 런치에 가면 1400엔인데!
그깟 도시락이 1500엔이라니! 그냥 과자랑 커피 사들고 다시 들어갔다.
이번에는 뒷자리에 앉아서 편하게 보았다.

속이 부대끼는 와중에도 과자와 음료수는 잘도 들어갔다.
역시 난 야구만 진득하게 보는 스타일은 아니었다.
사실 뭐, 누가 누군지도 모르겠고~ 경기도 살짝 지루하고~
주위를 휘휘 둘러보니 여기저기 맥주와 음료수를 파는 예쁜 언니들이 돌아다닌다.
맥주도 회사마다 다 있다. 아사히, 산토리, 삿뽀로, 기린, 에비스, 버드와이저...
심지어는 양주에 소주 파는 언니들도 돌아다닌다. (얼음에 우롱차도 완비!)
청승 떠는 김에 한잔 마셔볼까 싶어 손을 번쩍 들었다.
에비스 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그러나 그녀의 조끼에 새겨진 단 한마디. 한잔에 800엔.....;;;
그러나 이미 내 앞에 온 에비스 언니는 웃으며 맥주를 따르기 시작했다.

"오늘 경기 정말 빨리 끝나겠네요. 그쵸?"
"아 예.. ^^ " (너무 비싸! 너무 비싸! 게다가 거품은 왜 이렇게 많아!!! 도둑놈들!)

그러나 에비스와 눈이 마주친 건 다행이었다. 에비스만 아직 못 마셔봤기 때문이다.
수퍼에서도 에비스는 비싼 축에 속하니까. 처음 먹어보는 에비스 맥주는 약간 썼지만 맛있었다.
사실 비싸서 그렇지, 날씨도 살짝 덥고, 딱 맥주 마시기엔 좋은 분위기였다.
그리고 몰랐는데, 술김에 야구를 보니 집중이 훨씬 잘 되었다;;;
선수들 이름들도 눈에 들어오고 누가 잘 하고 누가 인기가 많은지도 보였다.
선수들의 입장곡도 우리나라랑 많이 비슷했다.
go west 랑 we will rock you 는 어디 팀에나 있는 듯 했다. ^^;

지루했던 경기는 막판에 불을 뿜더니 (술기운이었을까;;) 경기는 홈팀 자이언츠의 역전승으로 끝났다.
서포터들은 열광했다. 나 역시 괜히 감동스러웠다. 경기 후 MVP를 뽑는 것도 우리와 같았다.
단상 위의 인터뷰에 마스코트들에 둘러싸인 사진 촬영, 그리고 외야쪽에 싸인볼을 던지는 것으로
오늘의 경기는 정말로 끝이 났다. 나는 등번호 7번, 니오카(二岡)라는 애가 제일 마음에 들었다.
그냥 인상 귀엽고 빨라 보여서 좋았는데 집에 와서 찾아보니 썩 대단한 녀석이었다.
게다가 스위치히터. 오호~! 제법이잖아. 나이도 나랑 동갑이다. (괜히 반갑다;;;)

야구장을 나서며 지금쯤 퇴근하고 집에 돌아갔을 자이언츠의 광팬인 카즈짱에게 메일을 보냈다.
카즈짱은 집에 가자마자 티비를 켰는데 그나마 정규방송으로 끊었다며 같이 못간 것을 아쉬워했다.
역전 장면에서 확 뉴스로 넘어간 모양이다. ㅋㅋ (우리만 그런게 아니었군 ㅠ,ㅠ)
나는 니오카 맘에 든다 했더니 그녀 역시 니오카의 팬이라며 놀라워했다.
다음 번에는 왠지 카즈와 함께 외야에 앉을 듯한 기분이 들었다. ^^
기념품점에 들러 니오카 이름이 새겨진 볼펜을 샀다. 내일 보여줘야지.

전철 갈아타기 싫어서 지도를 봤더니 그냥 운동삼아 걸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이젠 큰 길에 떡 붙은 이정표만 봐도 예상 시간과 거리가 왠만큼 잡힌다.
이번에도 나의 예감을 믿고 동쪽으로 무작정 걸었다. 아니나다를까,
30분만에 아는 길이 나왔고 무사 귀가. 새로운 길을 발견해서 좋긴 했지만  
집에 와서는 완전 뻗었다. 발바닥은 다시 아파왔고 약국에 가기에는 너무 늦은 시간. 

티비에서는 우주비행사 노구치와 스마프의 인터뷰가 한창이었다. 서로 영광스러워 어쩔 줄을 몰랐다.
다른 분야에서 최고에 오른 사람들끼리의 인터뷰. 존경과 설레임이 넘치는 모습이 보기 좋았다.
기무타쿠의 저리도 밝은 표정이라니. 정말 오랜만이었다. 괜히 내가 다 좋았다. ^^;

김짱 도시락 & 내일 아침밥 메뉴로 카레를 만들었다.
간만에 밥통에 밥도 안치고, 썩어가는 야채가 없나 점검도 하고.
내일은 일어나자 마자 갓 지은 밥에 카레랑 해서 밥 먹어야지.
그리고 오늘 하기로 했던 일들을 싹 다 해야지. 음. 마치 개학 앞둔 아이 같다.





이젠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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