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 30일. 맑음. 떠나는 날.
아침에 눈을 떠 보니 눈이 탱탱 부어있다. 어제 살짝 눈물을 흘리긴 했지.
하지만 진짜 원인은 수면부족인 듯 싶다.
생각해보니 찜질방도 못가고, 노래방도 못가고, 병원도 못갔다.
안친한 사람 선물은 샀고, 친한 사람 선물을 못샀다.
길에 널린 떡볶이 한 접시 못 먹고 커피만 열잔을 마셨다.
대체 나란 애는 뭐하는 애지. 뭐 이런 바보가 다 있지.
그 동안 너무 떠들고 가식 떤 죄다. 다시 속이 쓰리다.
엄마랑 눈만 마주쳐도 마음이 짠해졌다.
오늘은 엄마 아빠랑 버스를 타고 공항에 가기로 했더랬다.
큰오빠는 오늘 오전 9시부터 민방위라고 해서 아침 일찍 오빠방에 인사하러 가보니
오빤 구청인지 동사무손지 전화를 걸어 날짜를 연기해달라고 부탁하고 있었다.
결국은 오빠차를 타고 모두 함께 출발했다. 거기까진 좋았다.
그런데 고속도로 빠지기 직전, 엄마가 급히 차를 세웠다.
아무래도 몸상태 때문에 안되겠다며 내 얼굴 한번 스윽 보시더니
집 방향으로 터벅터벅 걸어가시는거다. 다시 차를 돌리기는 어려운 거리였다.
놀란 아빠가 따라 내리시고 그렇게 안타깝게 인사를 했다.
참았던 눈물이 줄줄 흘렀다. 뻥 뚫린 고속도로를 달리며
'내가 지금 뭐 하러 어디로 가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떠나는 길이 이렇게 슬프기는 처음이었다.
공항에 도착. 오빠가 주차를 하는 동안 산만한 짐을 끌고 유나이티드를 찾아갔다.
오늘 아침 반찬이랑 간단한 짐 몇개가 추가되면서 왠지 무게를 초과했을 것만 같았다.
좋은 사람이 걸려야할텐데... 내 차례가 되고, 멀리서 웃으며 반기는 유나이티드 직원.
"어엇! 아톰이다!!!"
나는 검정색 아톰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
"예? 아.. 이거요.. 네.."
"오.. 아톰..."
"네;; 근데 짐 몇키로까지인가요?"
"미주는 32키로, 일본이면 20키로에요."
재어보니 23키로;;; 아톰에 정신팔린 이상한 직원에게 한가닥 희망을 걸고 중얼거렸다.
"저도 20키로로 봤는데요.. 32키로라는 사람도 있고.. 인터넷에 보니까 다들 말들이 달라서..
근데요. 집에서 쟀을때는 분명히 20키로였거든요.. 음.."
(부탁하는 것도 아니고 따지는 것도 아니고, 내가 생각해도 참;;;)
"네. 해드릴게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어느 새 번쩍하고 나타난 큰오빠, 가방 앞지퍼를 열더니
내가 따로 들고있던 책과 오빠 차에 있던 가그린, 자일리톨 등을 잽싸게 쑤셔넣었다.
대단한 순발력었다. 매우 자랑스러웠다.
홀가분한 마음으로 아침을 먹으러 돌아다녔다. 오빠가 만천원짜리 조식부페를 사줬다.
밤도깨비에서 먹던 호텔 아침부페가 생각났다. 빵, 시리얼, 베이콘, 에그스크램블, 과일..
딸기만 만원어치 먹은 것 같다. 오빠는 이런 나를 '대놓고' 부끄러워하지 않았다. ㅜ.ㅜ
이번 방문의 가장 큰 성과가 바로 큰오빠와의 자연스러운 소통이었다.
정신없이 슬펐던 마음이 조금은 따뜻해져왔다.
갈 시간이 되어 오빠랑도 어색하게 헤어지고 나는 게이트 안으로 들어갔다.
자리에 앉자 마음이 더 무거워졌다. 게다가 옆자리 아줌마는 제대로 진상이었다. ;;;
뜨악해하는 내 모습을 즐기며 두 시간 동안 똥매너의 모든 것을 쉬지 않고 보여주었다.
나리타 도착. 비가 내렸다. 너무너무 추웠다.
택배로 짐을 맡기고 한시간 반만에 집에 도착했다.
날씨라도 좋았으면, 그래서 상점가에 사람들이라도 북적댔으면 조금 나았을까.
처음으로 이 동네가, 이 집이 낯설고 어려웠다.
짐이 빨리 왔으면 좋겠다. 옷이라도 정리하면 나을까.
김치라도 썰어놓으면 나을까. 화장품이라도 끌러보면 좀 나을까.
차라도 한잔 끓여마시면, 아니면 한숨 자는 편이 나을까.
내일이 되면 나을까. 공항 사람들은 날 반가워해줄까. 그러면 좀 나을까.
이젠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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