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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눌러앉기/2004-2006, Japan

어디에도 없는 연인;

by 하와이안걸 2005. 4. 23.
4월 23일. 10시 근무.


"이짱. 여기 온지 몇년이나 되었어?"
"4개월."
"아직 못가본 곳이 많겠네."
"응. 그렇지 뭐."
"오늘은 그럼 일본 어디에 가고싶은지에 대해 이야기해보자."

성격좋고 귀엽고 날 잘 챙겨주는 아이란도의 구미(久美)는 사실 나보다 7살이나 어리다. ;;;
그러나 늘 언니 행세를 하면서 심지어는 나를 귀여워한다. -_-;;; 
내가 맨날 들고다니는 전자사전에 관심이 많고, 세상 연애에 끼어들고 싶어하는 구미짱.
주말인데도 한가한 시간이 많아서 오늘은 구미짱과 이야기를 나눴다.

"가보고 싶은 곳 있어?"
"음.. 디즈니랜드?"
"아~ 정말? 나 25일날 디즈니 씨(sea)에 가는데~"
"남자친구랑?"
"응! 나는 랜드보다 씨를 좋아해."
"연인들은 보통 씨를 많이 가더라."
"이짱 남자친구는 한국에 있는거야?"
"아니 없는데;;"
"아, 그럼 일본에서 만난거야?"
"아니 남자친구가 없다고..;;;"
"음.. 어디에도 없어?"
"으..응 ㅡ,ㅡ;;;"

(어디에도 없냐니... 엉엉... ㅠ_ㅠ;;;)  

"아, 내가 실례를 했네. 미안미안."
"아니야;;;"
"근데 원래 디즈니랜드 같은데는 친구들끼리 가야 재밌는거야. 괜찮아."
"응;;;"

점심을 먹고 사무실에서 레지 점검을 하다가 프린터기 용지 끼우는 곳에 눈을 절묘하게 찧었다. =.=
대체 어쩌다가 그렇게 되었는지 이해가 안간다. 그냥 자석처럼 내 머리가 프린터로 쏠렸던 것 같다;;;
간만에 눈 앞에서 별이 반짝! 했다. 시간이 갈수록 눈가에 열이 나고 빨개지는 기분.
왠지 자고 일어나면 부을것만 같다. 아,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되면 어떡하지.
아이란도로 돌아가서도 눈가가 얼얼해서 눈이 제대로 안떠졌다. 그런 내 모습을 보고 타마키가 말을 걸었다.

"아, 이상. 졸린거죠. 그래요. 이 일이 참 피곤한 일이죠."
"그게 아니고 눈이 아파서..."
"그래요. 그게 다 피곤해서 그런거 아니겠어요. 아, 큰일이네..."

'프린터 용지 투입구에 눈을 찧어 지금 얼얼하다.'는 문장을 머릿속으로 열나 만들다가 그냥 포기했다.
네. 맞아요. 요즘들어 좀 피곤하네요. 하면서. ;;;

아이란도에서의 즐거운 시간은 오래가지 못했다.
아이란도가 한가하다는 걸 눈치챈 사원들이 나를 다른 곳으로 계속 돌렸기 때문이다.
센베 코너에는 하타노가 신입사원 니시마기의 만쯔에 한창이었다.
나를 보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장동건 좋아해?"
"ㅡ,ㅡ;;;"
"장동건 좋아해?"
"그다지."
"역시 원빈을 좋아하는거군."
"별로;;"
"이상은 왜 한류스타들을 다 별로라고 해?"
"더 멋있는 배우들이 많거든요."
"그럼 이상이 좋아하는 탈렌트를 말해봐."
"음.. 김래원?"
"깅래우옹? 이름이 너무 이상해."
"김.래.원. 곧 일본에서 뜰거에요. 잘 외워두세요."
"알았어. 깅래우엉. 깅래우엉..."

갑자기 김래원이 떠오른건 요즘 들어 옥탑방고양이 생각이 많이 나기 때문이다.
신입사원의 에릭을 보면서도 왠지 김래원이 떠올랐다.
한국 드라마는 주인공이 다 아프고, 죽고, 이복형제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옥탑방 고양이 같은 드라마를 보여주고 싶다. 여기서 딱 히트칠만한데 왜 안해주는거야.

퇴근 후 스가모역 앞. 횡단보도를 건너려는데 건너편에 사람들이 좀 많이 모여있었다.
토요일 저녁이라 그런거겠지 싶었는데, 파란 불이 되어 길을 건너면서 보니 그게 아니었다.

땅바닥에는 일본 사람들 할복할 때 쓸법한 단도가 떨어져있었고
경찰 한명과 그의 등에 가려진 한 남자가 시시비비를 따지는 듯 했다.
그 때 그냥 지나쳤어야 했는데 난 경찰 뒤의 그 남자를 흘깃 보고야 말았다. 웁!!!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피투성이. 영화가 아닌 현실이었다. 설마 땅바닥에 떨어져 있는 저 칼로?
그러나 더 놀라운 건 경찰과 주변 사람들이었다.
경찰은 중상으로 이미 정신을 잃은 듯한 그 '환자'를 계속 범죄자 취급하며 훈계를 해다고 있었고,
주위에 모여든 사람들은 "스고이~"를 외치며 아무렇지도 않게 구경하고 있었다.
연인들, 아줌마, 학생들 아무도 얼굴을 찌푸리거나 놀라는 사람 한명 없었다.
나만 심장이 벌렁벌렁해서 집으로 후다다닥 도망쳐버렸다. 우웁우웁우웁!

집에 와서 눈에 바세린을 잔뜩 발라주었다. 마음 같아서는 김짱의 호랑이피 연고를 바르고 싶었으나
그러다가는 앞을 못볼지도 모르겠기에;; 가장 만만한 바세린으로 도배를 했다.
번들번들한 얼굴로 티비를 보는데 관광을 마친 김짱 모녀가 등장하셨다. 양손에 과일을 잔뜩 들고 ㅠ.ㅠ

올해 들어 처음 먹어보는 꿈의 딸기. 비싸서 한알씩만 사먹던 보약같은 사과.
그 돈주고는 절대 못사먹겠던 금쪽같은 귤. 어머니 감사합니다. 잘 먹겠습니다 ㅠ.ㅠ
"우리 애가 딸기대장이거든." 이 한마디에 사과만 열라 집어먹었지만 ㅜ.ㅜ
그래도 좋았다. 배부르도록 과일을 집어먹으며 수다를 떠는 토요일 밤이.




이젠 정말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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